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잔드 왕조 (문단 편집) === [[카림 칸 잔드]] === '''1759년, 카림 칸은 영웅 나디르 샤의 암살 후 12년간 계속되던 이란의 내전을 종식시켰다.''' 동쪽의 호라산에 잔존하고 있었던 아프샤르 왕조의 샤로흐 샤를 제외한 모든 왕공들이 그에게 복속했다. 1762년에는 조지아에 망명했던 아자드 칸이 항복해 왔다. 그는 이후 쉬라즈의 궁전에서 안락하게 갇혀 지내다가 1781년에 사망한 후, 유언에 따라 고향인 카불에 매장되었다. 스텝 지방으로 도주했다가 사로잡힌 모하메드 하산 칸의 아들 아가 모하메드와 호세인 쾰리 역시 처형당하는 대신 궁전에 연금되었다. 한편 승리한 후에도 카림 칸은 샤한샤로 등극하지 않고 일전에 모셨던 이스마일 3세를 그대로 둔 채, '''바킬 에 라아야'''(민중의 대표)만을 칭하며 실권을 장악하는 데 만족했다. --조조-- 카림 칸은 무리하게 호라산 원정에 나서기보다 피폐해진 이란의 재건에 힘썼다. 그는 감세 정책과 함께 농업을 장려하여 생산력을 높혔고, 영국과의 무역을 증대시켰으며 학자들을 후원하고 수도 쉬라즈에 여러 건축물을 세웠다. 1763년 카림 칸은 쉬라즈에서 멀지 않은 [[부셰르]] 항구에 [[영국 동인도 회사]]가 상관을 세우도록 허가했다. 이는 18세기 들어 [[걸프]] 지역에 침투하던 네덜란드 상인들을 견제하는 움직임이었는데, 동시에 그는 항구에서 얻은 수익을 현금이 아닌 이란산 제품으로만 가져갈 수 있게 하여 지나친 금의 유출을 방지했다. 다만 같은해 카림 칸의 이복동생이자 사촌인 자키 칸이 [[이스파한]]을 점거하고 주민들을 착취했다. 이에 카림 칸이 친히 남하하자 자키 칸은 후제스탄으로 도주하여 반란을 일으킨 데즈풀의 총독과 동맹하고 바크티야르 부족을 모아 군대를 조직했다. 이어진 1년 간의 전쟁과 협상 끝에 자키 칸은 결국 자비를 구하며 항복했고, 카림 칸은 이를 수용하며 그를 용서했다. --이름 그대로 관대함 그 자체--[* '''카림'''은 아랍어로 '관대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1773년 이스마일 3세가 승하하자 카림 칸은 후임 샤를 지목하지 않으며 완전한 군주가 되었고, 이로써 [[잔드 왕조]]라 불릴 수 있게 되었다'''. 내정에 치중한 카림 칸은 1763년 반란 진압 이후 10년간 원정을 나서지 않고 민생을 살폈다. 마침내 1773년 문제의 동생 자키 칸이 점차 독립을 넘보던 [[페르시아 만]]의 토후국들을 복속시킨 후, [[오만 제국]]령 [[호르무즈 섬]] 점령에 나섰으나 패전하고 말았다. 비슷한 시기, 1747년의 휴전 이후 평화가 유지되던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 배경은 이러하다. 이란 최대의 쉬아 성지인 마슈하드가 여전히 아프샤르 조의 수중에 있었기에 카림 칸은 오스만령 이라크에 있는 [[나자프]]와 [[카르발라]]로 향하는 이란의 쉬아 순례객들의 권리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총독을 세습하던 이라크 맘루크 정권의 우마르 파샤는 이란 순례자들로부터 과한 세금을 걷었고, 1773년 역병으로 순례자들이 사망하자 그 유산을 몰수했다. 이로써 '쉬아 이슬람의 보호자'라는 종교적 위상에 금이 가게 되자 카림 칸은 무력 대응을 고려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